주린이의 가치투자-가치투자 대가들의 원칙
증권분석의 창시차 - 벤저민 그레이엄
가치투자 역사에서 벤저민 그레이엄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요.
벤저민 그레이엄은 투자의 대가로 알려진 워런 버핏의 스승이며 가치투자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치투자의 대가로 세계적인 부를 일군 워런 버핏은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합니다.
그가 컬럼비아대학을 선택한 것도 그레이엄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고, 둘째 아들 이름을 ‘하워드 그레이엄 버핏’으로 지었을 정도입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은 1894년 영국 런던에서 아이작 그로스바움과 도라 부부의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한 살 때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갔습니다.
그가 9살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해 가세가 기울고 모친은 사업에 실패하면서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자랐지만 학업 능력이 뛰어나 전교 상위권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1914년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그레이엄은 월가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5년 만인 1919년 25세의 나이에 월가에 주목 받는 인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1926년 투자사 그레이엄-뉴먼을 설립한 후 그의 투자 이론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종목 선정 기준 1. 유동자산이 풍부하여 재무적으로 건전할 것 2. 꾸준히 이익을 내는 기업 3. 적절한 밸류에이션 수준일 것 4. PBR과 PER의 곱이 22배를 넘지 않을 것 5. 유동비율은 200% 이상 될 것 6. 장기 주당순이익(EPS) 성장이 과거 10년간 30% 이상이면서 5년간 평균이 마이너스가 아닐 것 7. 배당금이 계속 지급될 것 |
높은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자 스타일은 보수적인 편이라고 평가됩니다.
수익률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손실을 줄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종목 선정 기준에서 그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투자의 세계에서 그의 발자취는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감을 갖습니다.
그의 투자 철학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투자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으며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됩니다.
금융업계 최고의 자격증이라 할 수 있는 CFA(국제재무분석사)를 벤저민 그레이엄이 만들었으니 그의 존재가 투자의 세계에서 빛이 바랠 수가 없겠지요.
20세기 초중반, 티커테이프를 보면서 뽑기 하듯 주식투자하던 시대에 기업 가치를 꿰뚫어 본 그의 혜안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투자에 대한 체계조차 갖추어져있지 않던 1900년대에 가치투자의 기틀을 잡은 그의 업적은 아무도 다니지 않은 산속에 길을 만든 것과 같다 할 수 있겠습니다.
위대한 기업에 투주하라 - 필립 피셔
19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필립 피셔는 스탠퍼드대학 비즈니스스쿨 1학년 과정을 마치고 대공황이 오기 1년 전인 1928년 한 은행의 증권분석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931년 투자자문회사인 피셔 앤드 컴퍼니를 설립한 뒤 평생을 투자자문가로 활동한 그는 1960년대에는 스탠퍼드대학 비즈니스스쿨에서 투자론을 강의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고 2004년에 별세했습니다.
필립 피셔는 1958년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Common stocks and uncommon profits>라는 책을 쓰면서 투자의 세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1950년대에 처음으로 성장주에 대한 개념을 소개해 당시 투자 문화에 격변을 일으켰습니다.
투자의 현인 워런 버핏도 필립 피셔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필립 피셔의 투자 철학은 주식투자자들에게 중요한 철학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필립 피셔는 투자할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가치를 중요시했습니다.
투자할 회사 경영진의 가치관, 노사관계, 직원 만족도, 기술 개발 등 회사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장기 성장성을 찾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며칠, 몇 개월 보유하기보다는 최소 몇 년에서 십 년 이상 보유할 수 있는 장기성장이 가능한 기업을 찾고자 했죠.
필립 피셔는 계량적 가치투자 접근법보다는 기업의 질적·정성적 요소들을 분석하여 장기적으로 성장할 만한 회사들을 발굴하여 투자했고 그 결과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필립 피셔의 투자 철학은 15가지 기준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필립 피셔의 기업 선정 조건 1. 적어도 향후 몇 년간 매출액이 증가할 수 있는가? 2. 회사의 매출을 늘릴 수 있는 신제품이나 신기술에 대한 개발 의지가 있는가? 3. 연구개발 규모가 회사 규모에 비해 적절한가? 4. 평균 이상의 영업조직을 잘 갖추고 있는가? 5. 영업이익률은 충분히 만드는가? 6. 영업이익률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7. 노사관계는 원만한가? 8. 임원간의 관계가 좋은가? 9. 두터운 경영진을 보유하고 있는가? 10. 원가 및 회계관리 능력이 우수한가? 11. 특출난 사업 부문을 가지고 있는가? 12.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이 운영되고 있는가? 13. 가까운 장래에 증자 등의 계획으로 주주의 이익을 희석할 가능성이 있는가? 14. 경영진이 투자자와 잘 소통하는가?(호시절에만 소통하고 실망스러울 때는 입을 닫는가?) 15. 경영진은 진실한가? 최고로 진실한 경영진인가? |
의 투자 철학에서는 기업의 성장성만 담보된다면 다른 부분은 개의치 않을 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장가치가 담보된 종목을 포트폴리오에 담되 성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때 매도하라고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는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잘못 판단하는 실수를 했을 때, 두 번째는 15가지 기업 선정 조건 기준으로 볼 때 성장 가능성이 유효하지 않을 때, 세 번째는 더 매력적인 성장가능성을 가진 종목을 찾았을 때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에 해당되지 않고 성장성이 담보되는 종목이라면 계속 들고 가야 할 것입니다.
“주식을 매수할 때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했다면, 그 주식을 팔아야 할 시점은 거의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필립 피셔의 성장가치 투자 철학은 앞서 소개드린 그레이엄의 순수 가치투자와 비교되곤 합니다. 시기별로 성장가치가 주도하는 증시도 있지만 순수가치가 지배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21세기를 보더라도 2000년대는 순수가치가 우위에 있던 시대,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는 성장가치가 우위에 있던 시대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모두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가치투자 철학입니다.
오마하의 현인 - 워렌 버핏
단순히 주식투자를 잘하는 것을 넘어 매년 세계 부자 순위에 들어갈 정도로 절대적인 부를 일군 워런 버핏이기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주식시장 참여자들에게 중요한 투자 기준이 됩니다. 참고로, 포브스 선정 2020년 세계 부자 순위에서 워런 버핏은 675억 달러의 순자산을 기록하며 4위에 랭크되었습니다.
워런 버핏은 어린 시절부터 사업 수완이 좋았습니다. 6살 때 껌과 콜라를 친구들에게 팔아 이윤을 남겼고, 11살부터 주식투자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주가 차트를 보고 투자를 했는데 시티스 서비스Cities Service라는 주식을 38달러에 사서 40달러에 매도했지만 이후 이 회사의 주식이 200달러까지 상승한 것을 보고,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12살에는 선생님이 AT&T 주식을 갖고 있다고 하니, AT&T를 공매도한 자신의 매매 내역을 보여줄 정도로 10대에 이미 전문 투자자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핀볼 머신 대여 등 여러 사업을 하면서 돈에 대한 감각을 키우던 워런 버핏은 10대 후반에 이미 학교 교사들보다 많은 월수입을 만들었습니다.
이미 사업과 주식투자로 경제적으로 성공했기에 대학에서의 공부를 오히려 시간 낭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친의 권유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에 진학합니다. 대학을 마친 워런 버핏은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 입학하는데 그 이유가 앞서 소개한 벤저민 그레이엄을 만나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실제로 강의를 들었다고도 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워런 버핏은 벤저민 그레이엄을 만나고 그의 투자 철학을 받아들이며 깊이 존경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버핏은 벤저민 그레이엄의 투자회사에 근무하면서 투자 체계를 더욱 공고히 다졌습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가치투자의 이론과 체계를 만든 선구자라 한다면, 그의 제자인 워런 버핏은 실전에서 세계적인 부를 일군 ‘가치투자의 종결자’입니다.
버핏의 본격적인 투자는 1957년에 시작됩니다. 오마하로 돌아온 버핏은 10만 5100달러로 투자합자회사를 만듭니다. 그의 합자회사는 1969년까지 매년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하며 연평균 약 30%에 이르는 성과를 만듭니다.
1965년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의 경영권을 확보한 이후 2019년까지 55년간 버크셔 해서웨이의 시장가치는 274만 4062%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단위가 퍼센트이니 대략 2만 7441배의 시장가치가 증가한 것입니다. 같은 기간 S&P500지수가 배당수익률을 포함하여 누적수익률이 1만 9784%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성과는 신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가치투자의 이론과 체계를 갖추고 워런 버핏이 이를 현실에서 완성했다’는 표현이 무리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은 큰 틀에서 벤저민 그레이엄과 같지만 다른 측면도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하나는 그레이엄에 비해 성장성이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 두 번째는 공격적인 집중투자를 병행한다는 점입니다.
그레이엄의 투자 방식은 재무제표를 기반으로 자산가치가 저평가된 종목을 발굴하는 정통 가치투자입니다.
이 방법은 꽁초 전략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담배가 없을 때 버려진 꽁초를 줍는 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워런 버핏의 명성은 투자와 관련된 것으로만 생긴 것이 아닙니다.
부에 대해 남다른 시각을 갖고 적극적으로 자선사업과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에 부자증세를 제안하는 등 다른 부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투자 지혜를 넘어 철학을 알려주고 있는 워런 버핏.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모든 투자자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피터 린치
피델리티의 마젤란 펀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피터 린치입니다. 피터 린치가 활동했던 시기는 1977년부터 1990년까지로, 그는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재무적 독립을 완성하고 조기 은퇴하는 목표를 달성한 성공적인 펀드매니저입니다. 그가 일찍 은퇴한 데에는 인생에 굴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4년 태어난 피터 린치는 10살 때 아버지가 뇌암으로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물론 그 또한 파트타임 일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11살 때 그는 골프장 캐디로 일하게 되었는데요. 캐디 일을 하면서 그는 질레트, 폴라로이드, 피델리티와 같은 대기업의 회장이나 대표이사들을 고객으로 두면서 클럽 회원들로부터 주식시장에 대하여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피터 린치는 1966년 5월 피델리티에 인턴으로 고용되어 첫 출근합니다. 그 후 와튼스쿨 대학원을 다니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당시 투자에 관한 이론은 효율적 시장가설과 랜덤워크 이론이 지배적이었는데, 피델리티에서 그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 이론들의 모순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모든 정보는 이미 주가에 반영되어 있다’라고 했지만 그가 마주한 시장 현실은 효율성과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학자의 길과 금융시장 현장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현실과의 괴리, 와튼스쿨 교수들의 투자수익률이 피델리티 동료들의 수익률보다 못하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금융시장 현장에서 뛰기로 결정합니다.
1969년 제대 후 피델리티에 기업 애널리스트로 복직했고, 1974년에는 리서치 담당 이사로 승진합니다. 그리고 1977년 5월 마젤란펀드의 총책임자가 되면서 2천만 달러의 자산으로 펀드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마젤란펀드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죠. 피터 린치의 마젤란펀드는 10년 연속 수익을 거두면서 1987년의 펀드 자산 규모가 스웨덴 국민총생산만큼이나 커진 100억 달러에 이르렀고, 1990년에는 140억 달러로 성장합니다. 13년 동안 그가 거둔 수익률은 연평균 30%, 누적 2700%에 이릅니다.
이렇게 놀라운 투자 성과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피터 린치의 집요하고 파고드는 성격이 한몫했습니다. 그는 13년 동안 1만 5천여 개에 이르는 기업에 투자했고, 이 중 1/3은 직접 방문해서 투자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매일 투자할 기업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나 일에 대해 집착이 강했는지 딸의 생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2,000개에 이르는 기업들의 종목코드는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은퇴 후 그는 투자에 관한 많은 지혜들을 강연과 책으로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군중심리를 가늠하는 이론으로 알려진 칵테일파티 이론입니다. 피터 린치와 같은 펀드매니저가 칵테일파티에 갔을 때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싼 가격에 주식을 살 수 있는 침체 국면이지만, 너도나도 펀드매니저 주변에 몰려 주식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심지어는 개인투자자가 펀드매니저에게 투자에 대해 훈수를 둔다면 과열이라 볼 수 있다고 하는, 일종의 군중심리 지표입니다.
피터 린치의 투자 황금규칙 ■ 뛰어난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시간은 당신 편이다. ■ 당신이 잘 아는 곳에 투자한다면 전문가보다 더 월등한 수익률을 만들 것이다. ■ 당신이 전문투자가 집단을 무시한다면, 증시 평균보다 더 높은 성과를 만들 수 있다. ■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공과 주식의 성공은 100% 상관관계가 있다. ■ 자신이 어떤 주식을 왜 갖고 있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 주식투자는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 잘 돌볼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보유하지 말라. ■ 매력적인 기업이 없을 때는 그냥 돈을 은행에 넣어두라. ■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성장산업 주식, 최고 인기주식은 피하라. ■ 소형주 투자 시에는 흑자로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 ■ 침체 산업 주식 매수시에는 살아남을 기업을 사라. ■ 주식시장의 하락은 1월의 눈보라처럼 일상적인 일이다. 주가 하락은 싸게 살 기회다. ■ 기업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투자하는 것은 포커판에서 카드를 보지 않고 치는 것과 같다. ■ 채권을 선호하는 사람은 스스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 백미러로는 미래를 볼 수 없다. ■ 회사 사무실이 사치스러운 경영진은 주주의 이익에 신경 쓰지 않는다. ■ 아우토반을 달릴 때는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 ■ 어떤 기업의 매장을 좋아하면 그 주식을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기업 내부자가 주식을 사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이다. |
역발상 투가 - 존 템플턴
존 템플턴 경, 그의 이름 뒤에는 항상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받은 작위 칭호가 따라붙습니다. 단순히 투자를 잘해서가 아닌 그가 일군 부를 토대로 종교와 봉사계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템플턴상’을 제정하여 국제사회에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가 2008년 7월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에도 부고가 떴을 정도로 금융시장 및 국제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던 인물입니다.
템플턴은 1912년 테네시주 윈체스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예일대학 2학년 때인 1931년, 주가의 움직임이 급변하는 것을 관찰한 그는 기업가치에 비해 급변동하는 주가에 의문을 가졌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투자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 전공을 마친 템플턴은 미국으로 돌아와 메릴린치의 투자자문 부서에서 근무하다 지질탐사 회사로 옮깁니다.
1968년 그는 일본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합니다. 템플턴은 일본 증시의 저평가 매력을 보았던 것이지요. 공격적인 글로벌 역발상으로 최대 50%까지 일본에 투자했던 템플턴은 이후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증시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동안 그 성과를 만천하에 보여줍니다. 참고로 1969년 연말 2천 200엔 부근에 있던 일본 니케이 지수는 1986년 말 9배 가까이 상승한 1만 9천 엔 부근에 이르고 1989년에는 거의 4만 엔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역발상적 투자가 적중한 것입니다.
1992년 자신의 뮤추얼 펀드 회사를 매각하며 공식 은퇴한 템플턴 경은 그 후에도 강연과 자문 그리고 투자활동을 지속했습니다. 1912년에 태어났으니 80세의 나이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현업에서 은퇴한 그였지만 1990년대 후반의 투자 결정으로 다시 한번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아시아 외환위기 시기인 1997~1998년에 한국, 싱가포르, 호주 등에 과감하게 투자했던 것입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한국 증시에 투자하며 다른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도 한국 증시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던 한국에 투자한 역발상적인 결정은 템플턴의 명성을 한국은 물론 세계의 투자자들에게 깊이 새긴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발상적 투자 철학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80대였던 2000년 초, 한 강연회장에서 투자 대상으로 보고 있는 모든 나라의 주가가 고평가되어있다며 투자 자산의 75%를 미국 국채에 투자하라 한 것입니다. 당시 IT 버블이 극에 이르던 시기였고 21세기에 대한 기대 속에 주식시장은 끝없이 올라간다는 분위기가 가득할 때였습니다. 그 시점에 템플턴 경은 주식 비중 축소, 채권 비중 확대를 설파한 것입니다. 나머지 주식 25%도 헬스케어 관련 산업에 투자하라 했는데 그의 전망은 적중하여 2000년 IT 버블이 붕괴하고, 제약·헬스케어 주식은 상대적으로 크게 상승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장기적 투자 목표를 돈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고 정신적 진보를 하는 데 두었습니다. 그 뜻은 1972년 종교와 봉사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템플턴상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상금은 140만 달러로 노벨상의 100만 달러보다 많습니다. 수상자에는 마더 테레사,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 그는 템플턴상에 대한 공로로 1987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의 투자 철학은 “비관론이 극에 달할 때 투자하라”라는 역발상적 투자입니다. 그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1달러 이하 주식을 100달러씩 104개 종목에 투자한 성공담,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던 일본 증시를 1960년대 투자한 용단, 외환위기로 공포에 빠졌던 1997년 한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에 했던 과감한 투자 등은 우리가 시대를 넘어 가져야 할 투자 철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템플턴 경처럼 투자하려면 마음 속에서 강한 거부감과 공포심 혹은 흥분이 느껴질 것입니다. 역발상적으로 투자를 결정한 후 혹시나 마음 한구석이 요동칠 때, 투자심리를 다스리기 위한 템플턴 경이 남긴 명언을 다시 한번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